죄와 의인

박옥수목사 계열의 구원파 소위 기쁜소식선교회의 김동성목사가 쓴 글을 보자.

#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난 후에 ‘당신은 이제 정말 손끝만큼도 죄가 없느냐?’는 질문에 좀 꺼림칙한 대답을 하는 경우를 본다. 왜냐 하면, 조금 전만 해도 더러웠던 자기가 ‘어떻게 한 순간 만에 죄가 조금도 남지 않고 깨끗해 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은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고 불완전하므로, 사람이 나의 죄를 씻었다면 완벽하지 못하겠지만, 우리의 죄는 하나님이 씻으신 것이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손끝만큼도 죄가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분은 완벽하시기에 ‘하나님, 당신이 씻으셨으므로 나는 완벽하게 씻겨진 깨끗한 사람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죄가 차츰차츰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고 믿는 순간 한꺼번에, 모든 죄의 짐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김동성,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기쁜소식 선교회나 이요한계열이나 권신찬계열의 구원파는 모두 그 교리가 유사하다.
그들은 자의적인 해석이 가미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고 하지만, 이 “회개와 죄”에 대한 교리는 원래 배타적 형제교회의 한 분파적인 외국선교회에서 들어온 것이며, 이들 구원파라고 불리는 교회들은 모두 이 한 형제교회 계열의 외국선교사에 의하여 전래된 것으로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의인이 된다. 그것은 어느 교회에서도 가르치는 것과 동일하다.
어느 교회에서 예수를 믿고 죄사함을 못받는다고 가르치는가?

그런데 구원파의 주장은 무엇이 다른가?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은 “실제로 손톱만큼도 죄가 남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박옥수목사의 주장: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의인이 되면, 실제로 온전한 의인이 되며, 모든 죄가 다 없어진다.
일반교회의 주장: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의인이 되지만, 믿음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으며, 실제로는 죄(죄성)가 남아 있다.

혹간 어떤 사람들은 별로 중요한 차이점이 없다고 말을 할른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매우 큰 차이점이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온전한 의인이 되며, 실제로 모든 죄가 없어진다면….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1)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자는 더 이상 성령의 인도가 필요하지 않다.(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직접 거하시므로 우리를 죄로부터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우리가 온전한 의인이 되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은혜로서 구원을 얻는 것이다)

(3)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온전한 의인이 되었으며, 실제로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죄를 짓는가?

(예수를 믿어도 누구나 죄를 짓는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요한은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우리”라는 일인칭복수대명사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다. 즉 사도요한을 포함하여 “우리”는 죄가 있다는 것이다.

구원파는 자백과 회개가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은 마치 단어장난을 하는 것과 같다.
죄가 전혀 없는 온전한 의인이 왜 죄를 자백하는가? 없는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억지 고문을 당하였단 말인가?
또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를 속이고 진리가 그 안에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구원파들은 죄가 없다고 한다…..성경과 일치하는가?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에게 아직 죄가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7-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누가 사도바울을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할 것이며, 과연 사도바울이 없는 죄를 자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 사도바울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라고 권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온전한 의인이 되었고 죄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면, 우리는 더 이상의 성령의 인도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왜 온전한 의인이 되어 죄가 없다고 하는 성도들에게, 성령의 소욕을 따르라고 말하고 있을까? 성령께서는 왜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시며, 성도들을 인도하시는 것일까?

예수를 믿음으로 죄가 없어진다는 것은 실제로 죄가 없어짐으로 의인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불법이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것이며,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특별히 구약에서 “속죄”라고 하는 용어는, 히브리어에서 “키퍼”(kipper)라는 동사이고, 그 동사의 명사형은 “카파르”(Koper: 배상금)가 된다.
키퍼의 의미는 원래 “덮다. 가리우다”는 뜻이다.

즉 속죄라는 개념은 죄를 덮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어에서는 “카탈라게” 혹은 “힐라스코마이”등의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히브리어 “키퍼”와 같은 동의어이며, 역시 “덮다. 제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구약의 제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당사자가 희생제물로 제사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가 실제로 온전한 의인이 되어지지는 못한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황소나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히10:4)라고 말하였는데, 즉 “대속”이란 개념은 우리의 죄를 실제로 없도록 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덮어지며 가리워지는 것을 말한다.

–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구약의 제사에서 이 속죄의 피를 뿌리는 장소가, [카파르]와 같은 어근의 명사 “카포레스(속죄소)”, 즉 죄를 덮는 장소였다(출 25:17).
칠십인역은 이 단어에 헬라어 “힐라스테리온”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 말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용어로서 씌어져 있다(롬 3:25 화목제물, 히 9:5 속죄소).
“화목제물”을 말하는 헬라어 “힐라스테리온”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는 “희생제물”을 가르킨다.

즉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는 것이며, 그 제물이 죄를 가리우고 덮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서9:5에서 법궤 윗부분의 “속죄소”라는 단어에 이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사도요한은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요일2:2. 4:10)이라고 말하였으며, 히브리서 기자도 그리스도가 “백성의 죄를 구속하기 위하여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셨다”(히2:17)고 말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죄책(罪責, 죄에 대한 책임)이라고 부르는데, 죄책을 없게 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즉 믿는 자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그가 실제로 온전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는 죄책을 면제하여준다는 것이다.

의인이라고 칭하여줌(칭의)이란 것은 법정용어인데, 죄가 있고 없고를 떠나, 신분적인 무죄선언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정죄(定罪)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노라.” (롬8:1)

즉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구원은 값없는 은혜로서 우리가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닌가?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4:18)

구원파들에게는 이 성경구절이 보이지 않는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구원파의 교리는 비밀과 깨달음이 아니라, 너무도 단순하고 부분적인 주장으로서, 성경이 말하는 회개에 대한 정의, 죄인과 의인에 대한 정의, 죄에 대한 정의조차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기존 교회를 모두 일컬어 비복음적이며 구원받을 수 없는 잘못된 교회로 간주하고, 기존 신학대학의 신학체계를 부정하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박옥수측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할 것이다. 그는 기존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목사의 자격과 요건을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독립침례교회 중 형제교회(brethen church)라는 곳 중에서 구원파와 아주 유사한 주장을 하는 곳이 있다. (다만 현재의 형제교회는 그 분파가 다양하므로 그 교리나 사상에 대해서 한마디로 규정하여 언급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지방교회 워치만 니가 형제교회의 존다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 연관성을 추론할 수 있다.)

또 박옥수목사의 학력에 대한 이야기가 문제가 되어지는데, 그가 중학교 중퇴라는 것이다.
유병언, 이요한등의 학력도 비슷한 저학력이라고 한다. 물론 저학력이라는 것이 다른 것보다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외국어, 문법, 문장구조, 해석학, 철학, 역사등 다양한 방면에 대해 공부를 함에 있어서, 최소한의 학문적인 배경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먼저 이들의 특징적인 교리중 가장 중요한 것은 대략적으로 알아본다.

1. 예수를 믿는 자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므로 회개를 하지 말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소위 그가 말하는 이것이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며, 이 비밀을 깨달아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일상적인 죄를 뉘우치는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위험한 주장이 되어지며, 어떤 죄를 저질러도 무방하다는 도덕폐기론이 되어질 수도 있으며, 믿음이 아니고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이 되고만다.

2. 천국에는 죄인이 갈 수 없으며 의인만이 들어가며, 예수를 믿는 자는 이미 과거, 현재, 장래의 모든 죄를 사함을 받고 이미 온전한 의인이 되었으므로 죄가 없으며,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죄인이므로 구원을 못받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거듭남의 단회적인 회개(믿음)와 성화라는 과정을 통한 반복적인 회개에 대해 정확한 구별을 못하기 때문이다.

3. 이러한 단회성 회개(믿음과 깨달음)가 곧 구원이므로, 성도는 자신이 몇월몇일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궁극적으로 구원의 주는 누구이며 누가 심판을 하는가? 또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받은 구원의 현재적인 의미만을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성경적 구원관이 아니다. 이것 역시 구원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잘 모르기 때문이 빚어진 결과이다.

4. 일반교회를 강하게 부정하고 비난하며, 비성경적인 교회로서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 일반교회는 율법적인 구원관을 갖고 있으므로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일반교회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키는가? 대한민국의 정통교회는 모두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새벽예배, 십일조, 주일성수등이 율법주의라고 주장하는데, 어느 교회도 정상적인 정통교회라면 새벽예배나 십일조나 주일성수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새벽에 예배를 드리지 않아야만 종교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주일성수를 하지 않아야만 하며, 십일조를 내지 말아야만 율법주의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곳이 박옥수의 구원파라면 오히려 그 저의가 상당히 의심스러웁다.

구원파의 주장이 왜 옳지 않는가에 대해서 세가지의 관점에서 비판하여 보며, 또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1) 회개와 믿음이란 무엇인가?
(2) 죄인과 의인이란 무엇인가?
(3) 죄란 무엇인가?
(4) 구원의 확신이란 무엇인가?

1) 회개와 믿음이란 무엇인가?

회개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두 개의 단어가 있다.
첫째 나함이란 단어로 그 뜻은 “후회하다”는 말이다. 과거 자기가 행한 죄에 대해서 부끄러워 하는 것을 말한다(창6:7, 렘8:6) 두 번째, “슈브”란 단어로 “뒤로 돌아서다”는 뜻이다.
헬라어로서 중요한 단어는 “메타노이아”인데 메타란 말은 “후에(after)”이고 누스란 단어는 “마음”(mind)이다.
즉 나중의 생각과 감정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메타노이아”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방향수정>을 의미한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진로에서 이탈되었을 때,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방향수정을 “메타노이아”라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

즉 회개란 용어가 단회적으로 사용되어질 때에, 그 “회개”란 용어는 “믿음”과 같은 의미가 된다.
예를 들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은 믿음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을 때의 회개를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로 “회심”이라고 하며 “회개와 신앙”이라고 한다. 즉 그 “회개”는 “불신으로부터의 돌이킴. 방향수정”을 말한다.
이러한 회개와 믿음은 분명 단회적이다….
그러나 “범죄로부터의 돌이킴”, 즉 그러한 방향수정도 “회개”이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지속적이며 반복적이다. 이러한 범죄로부터의 방향수정, 즉 회개도 성경에 분명히 언급되어있다는 것을 뒤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기쁜소식 선교회라고 하는 박옥수(구원파)는 믿음을 의미하는 “회개”와 성화적이고 일상적이며 반복적인 “회개”와 착각을 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이러한 단회적 회개(믿음)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회개(성화)를 모두 언급하고 있으며, 일반 교회의 정통신학에서도 단회적인 회개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키고 있다.
즉 박옥수는 일반 교회에서 단회적인 회개에 대해서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박옥수목사는 “거듭남의 비밀” 혹은 “죄사함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데, 그것은 그가 주장하듯이 결코 “비밀”이 아니다.
박옥수목사는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 자로서, 정통신학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정통신학책이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자….

– 새 생명을 심어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중생은 결코 반복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회심도 또한 반복될 수 없다. 이것은 중생의 변화가 인간의 의식생활에서 처음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반복되는 회심에 대하여도 말할 수 있다.(루이스 벌콥, 기독교 신학개론 256쪽)

– 따라서 최초의 믿음과 회개는 생애 중 단 한번 있는 일이고, 그 일이 일어날 때 참된 회심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믿음과 회개의 마음의 자세는 회심때 단지 시작될 뿐이다. 그 때의 그 자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지속되어야 한다.(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345쪽)

루이스 벌콥과 웨인그루뎀은 장로교의 조직신학 학자로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장로교의 신학은 단회적인 회개(믿음, 거듭남)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성화적인 회개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로교와 더불어 양대산맥이라고 하는 감리교의 요한웨슬레의 견해를 들어보자….

– 이 회개(중생후의 반복적인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연관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니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곧 육에 속한 마음입니다. 중생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것이 남아있으나 지배하지는 못합니다.(웨슬레 조직신학 199-200쪽)

즉 박옥수목사의 가장 중요한 이단성은, 성화적인 개념의 반복적인 회개에 대한 정확한 뜻을 잘 모르면서, 회개하면 구원을 잃는다고 가르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정통신학에서 모두 평범하게 가르치는 것을 오직 자신들만이 깨달은 비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치우치는 편견이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구원파의 주장이 왜 틀린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회개한다”는 말은 같은 것이다. 회개는 곧 하나님을 향한 궤도이탈에서 방향수정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거스틴은 믿음과 회개는 동전 양면과 같다고 하였다.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2:37)

위의 구절에서 “회개하라”는 말은 곧 “믿으라”는 말과 같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에게로의 방향수정을 촉구하는 말이다.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 회개하였을 때에 삭개오가 과연 믿음이 없는 회개만을 하였을까? 삭개오의 회개는 믿음이 병행된 회개였으며, 당연히 믿음이 배제된 회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회개케 하는 믿음”이며 “믿게하는 회개”일 것이다.

회개하다는 헬라어의 단어는 “메타노이아”(명사), 메타노에오(동사)”가 주로 사용되었다.
구원파의 주장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를 믿을 때에 한번만 회개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장래의 죄까지 모두 사함을 받았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예수를 믿으면 죄인에서 의인이 되었으므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믿음의 시작만을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성화의 개념을 전혀 부정하는 것이며, 인간에게 믿음을 유지할 필요성과 일상적인 회개를 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 바로 구원파의 주장인 것이다.
마치 한번만 믿으면, 두 번 다시 지속하고 반복하여 믿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성화적인 과정에서의 회개가 필요없다고 말하는지 살펴보자.

계시록 2-3장을 보자.
일곱교회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회개하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단어는 모두 “메타노에오”이다.
그 교회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 교인들로 처음 믿음의 회개와는 구별되어지며, 다시 믿으라는 경고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메타노에오(회개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계시록에서 볼 때에 회개(메타노에오)라는 단어가 오직 단회성에만 사용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에베소교회: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2:4) 그래서 회개하고 처음 행위(사랑)을 가지라고 권한다. 성령께서 교회에게 이르는 말인데, 만일 회개치 않으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긴다는 것이다.(2:5) 그런데 박옥수 구원파는 회개할 필요없다고 한다.

버가모교회: 버가모에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2:14) 즉 타종교의 우상사상이다. 성령께서는 회개하라고 하신다.(2:16) 그런데 구원파는 회개하면 안된다고 한다.

두아디라교회: 두아디라교회는 음행과 우상숭배를 한다.(2:20-21) 물론 성령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그러나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움을 받는다(2:22)
두아디라교회의 교인들이 박옥수의 주장을 따르면 그들은 구원을 잃게 된다.

사태교회: 살았다하나 죽은 교회이며 온전하지 못하다.(3:1-2) 더러운 옷을 입은 자가 몇명이 있다(3:4) 성령께서 회개하지 않으면 도적같이 임하신다고 책망하신다(3:3) 회개치 않으면 생명책에서 지운다고 하신다(3:5) 계시록의 말씀대로 회개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남게 되지만, 구원파의 주장을 따르므로 회개치 않으면 이름이 지워진다….

라오디게아교회: 찹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갖었고, 부자이기에 구제사업을 전혀 하지 않는다.(3:15-17) 그래서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고 권한다.(3:19) 회개하는 자는 보좌에 앉게해 주신다고 하신다(3:21) 그냥 회개가 아니라, 열심을 내어 회개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박옥수는 죄사함의 비밀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보좌에 앉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박옥수 옆자리에 앉기를 원하는가?

살펴 본대로, 계시록에서 회개(메타노에오)라는 단어는 단회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믿는 교회의 교인들에게 방향수정을 촉구하는 회개를 가르킨다.
즉 이미 예수를 믿는 자는 회개하면 안된다는 박옥수의 주장은 비성경적이 되어진다.

더 명백한 성경적인 증거를 보자.
주기도문이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일상적인 기도문이다.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즉 우리가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사하여준 것과 같이, 예수님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형제들이 회개하면 하루에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 역시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 죄를 하루에 일곱번이라도 반복하여 용서하여 주실 것이 분명하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17:3-4)

윗 구절에서 회개는 “메타노에오”이며, 그 단어는 결코 단회적인 믿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위 본문의 메타노에오라는 단어는 일상적인 범죄에 대한 반복적인 방향수정을 뜻하는 것이 명백하다.
만일 “메타노에오”가 단회적인 믿음을 말한다면 일곱 번을 믿으라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우리가 우리에게 일상적인 죄를 지은 자에게 일곱 번을 용서하듯이, 주기도문의 용서도 그렇게 하여주신다는 것이다….. 박옥수계열의 구원파는 주기도문을 회중기도문으로 외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주기도문은 암송하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그 때문이 아니라 주기도문이 그들의 교리와 다르다는 것이 그들이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는 그 이유일 것이다.

이미 목욕한 자도 발은 씻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성경본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를 믿는 죄씻음의 믿음은 단회적이지만, 그러나 지속적, 반복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정결케 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을 상징한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13:10)

또 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지 않았는가? 사도바울은 사도가 된 후에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박옥수는 이 동사의 시제가 과거라고 주장하는데, 이 동사(헬라어, 에이미: am)는 과거가 아니라 분명한 현재동사 일인칭 단수이다.

–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보면, 바울이 과거에만 죄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로마서 7장17-25절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아직도 죄가 남아있음을 고백하는데, 그렇다면 바울은 구원을 잃었단 말인가?
구원파의 주장을 인정하자면 성경의 인물들이 모두 구원을 잃는다….
사도요한과 그의 서신을 받았던 소아시아교회의 성도들도 모두 구원을 잃는다….

–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요한은 영지주의자라고 불리는 거짓교사들과 이단들을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목적으로 이 서신을 쓰게 된다.
우리가 죄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진리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이다. 구원파는 이러한 것을 회개가 아니라 “자백”이라고 궤변을 늘어 놓는다.
또한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미쁘고 의롭다고 말하였는데….. 죄가 있으니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닌가? 박옥수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예수를 영접한 자들에게는 더 이상 죄가 없다고 하였는데, 왜 자백을 하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죄가 없는데도 자백을 하여야 한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죄가 없는데도 죄를 자백하여야 하며, 없는 죄를 자백하는 사람에게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에게 이미 없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가?

구원파의 주장을 따르자면 하나님을 거짓말을 하는 자로 만들며 그야말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또 자백은 해도 좋고, 회개는 하면 안된다는 주장은 말장난이 아닌가?
박옥수의 주장을 보면, 일반교회가 새벽에 눈물 콧물 흘리며 울고 불고 하는 회개에 대해서 조롱하듯이 비난하는데, 박옥수목사는 “회개”란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반교회는 새벽에 눈물과 콧물을 흘려야만 회개를 하는 것이라고 결코 가르키지 않는다.
울어도 좋고 울지 않아도 좋으며, 새벽에 회개하여도 좋고 저녁에 회개하여도 좋다.

박옥수목사는 자신의 궤변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일반교회의 회개의 개념을 왜곡, 과장하여 희극화시키며 비난하고 있다.
어느 일반교회가 회개의 정의에 대해서 “새벽에 울고 불면서 눈물과 콧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가르치는가?
게다가 구원파는 새벽예배를 부정하고 비난하고 있다. 그렇다면 새벽예배를 드리지 않아야만 구원을 받는가? 박옥수는 새벽에 기도를 하신(막1:35) 예수님도 비난하는가?

또 시몬의 경우를 보자. 성령의 능력을 돈을 주고 팔라고 하다가 사도들에게 큰 핀잔을 받는 장면이 사도행전에서 언급된다.

–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행8:13)

이 구절에서 혹 사람들은 시몬이 과연 예수를 진정으로 믿었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본문에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시몬이 참신자였는가가 아니라, 베드로가 시몬에게 충고한 내용에 있다.
베드로는 시몬에게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고 충고하였으며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말하였다.

박옥수목사의 경우에는, 더 이상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지만, 베드로는 “악함을 회개하면 사하여 주시리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사도와 박옥수목사 중에서 누구의 견해가 옳은가?

물론 시몬이 진정 베드로의 충고를 듣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성경에서 더이상 기록하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메타노에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메타노에오)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8:22)

베드로가 시몬에게 “회개하라”는 말은 시몬이 그 악함을 뉘우치고 다시 고하여 기도하고 사함을 받으라는 의미가 분명하며, “메타노에오”라는 단어는 죄로부터의 돌이킴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앞에서 엄급하였듯이, 일반교회는 거듭남(중생)의 단회적인 회개와 성화과정의 반복적인 회개의 두가지 개념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키고 있다. 즉 거듭남은 단회적이라는 것도 분명히 가르친다.
더욱이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단 한번의 제사라는 것은 주일학교 학생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한 것을 비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코메디가 아닌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욥은 의인이었으나, 욥이 하나님을 뵈었을 때에 이렇게 말하였다.

–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욥의 회개는 하나님을 믿고 다시 믿음을 갖겠다고 해석을 할 수는 없다. 즉 구원파의 주장대로라면 의인이었던 욥은 자기 죄를 회개하였으니, 구원을 잃어야만 한다.
그런데 욥은 구원을 잃지 않았다…. 구원파에서는 욥이 구원을 잃었다고 가르키는가?

–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삼하24:10, 대상21:8)

다윗은 분명히 “자신이 죄를 범하였으며 자신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인구조사를 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한 다윗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또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범죄를 저지른 후에,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자신이 죄를 범하였다고 회개하는데, 다윗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였으므로 구원을 잃었는가?

–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삼하12:13)

이 사건에 대해서 다윗은 시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1-5)

다윗은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하였으나 구원을 잃었는가? 다윗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으니 구원을 받지 못하였는가?
박옥수목사의 주장대로라면, 구원을 받은 다윗은 죄가 없어야만 하며, 온전한 의인이므로 회개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런데 왜 다윗은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라고 고백하였으며, 자신의 죄를 말갛게 씻겨달라고 하였으며, 깨끗이 제하여달라고 하였는가?
다윗은 분명히 자신이 주께 범죄하고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인구조사 후에 또 우리아를 범하고 난 후 두 번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는데, 박옥수목사의 주장대로라면 분명히 구원을 잃게 된다.

이와 같이 성경본문에서 “회개”라는 용어가 예수를 처음 믿는 단회적인 신앙의 거듭남만을 반드시 의미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어진다.
다음 성경구절은 “돌이켜 회개하라”고 하였는데, 왜 “모든 죄”에서 떠나라고 말하고 있으며, “각 사람의 행한대로” 국문한다고 하였는가?

–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대로 국문 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 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겔18:30)

박옥수목사는 죄를 회개하면 죄인이 되어서 구원을 잃는다고 하였는데, 다음 성경본문은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죄악을 숨기지 않고 죄를 아뢰면 주께서 죄의 악을 사하여 주신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박옥수계열의 구원파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 회개하면 죄인이 되므로 구원을 못받는다.
# 한번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으면 죄가 실제로 전혀 없어지므로 온전한 의인이 되어진다.

그런데 성경은 정반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박옥수가 주장하는 거듭남의 비밀이란, 겨우 성경에 기록된 것과 반대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박옥수는 “비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그 비밀을 깨달아야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케 하였다할 자가 누구뇨?(잠20:9)

– 하나님 한 분 외에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18:19)

죄가 있다고 하였던 아래 성경구절을 기록한 기자들은 모두 구원을 잃어버렸는가? 성경의 기자들은 과거에만 죄인이었다고 말한 것인가?

–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

–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8:36)

–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3)

–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롬3:8-9)

–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2) 의인과 죄인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알 듯이, 예수를 믿으면 죄인이 의인으로 바뀐다.
그것을 칭의라고 부르며, “의롭다함을 얻음” 혹은 “의롭다함을 받음”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칭의란 실제로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이라고 불러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우리는 죄사함, 속죄라는 용어를 잘 파악하기 위하여 구약의 제사에 대해 살펴보자…. 어린 양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 양에게 죄를 전가시킨다. 과연 구약의 유대인들이 짐승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그 죄가 실제로 없어지며 온전한 의인이 되어질까? 그들은 결코 온전한 의인이 되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계속 죄를 범하였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들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대한 면책을 주시는 것이다.
즉 죄를 가리워 주시는 것이며 심판을 면제해 주시는 것이다.

“속죄”를 가르키는 대표적인 구약의 히브리 단어는 “카파르”인데 그 단어는 “덮다, 가리우다”를 의미한다. 구약에서의 궁극적인 죄의 속죄는 희생제사였으며, 신약에 있어서도 궁극적인 죄의 속죄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과연 구약에서 짐승으로 제사를 지내면 그 당사자의 죄가 모두 없어지며 실제로 의인이 되었을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 인한 화목제물”(롬3:25)이라고 말하였는데 “화목제물”이란 단어는 헬라어 “힐라스테리온”으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는 “희생제물”을 가르킨다.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마1:21)

이것이 바로 대속이다….. 우리 죄인들이 의인으로 정말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임을 잊지말자.
그의 피흘림으로 인하여 우리 죄가 덮어진 것이며, 사함을 받은 것이며,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다. 성경을 잘 정독하여 보자….. 죄가 정말로 없어져서 실제로 온전한 의인이 된 것인지, 아니면 죄가 가리워지고, 의롭다하심을 얻고, 사하심을 받은 것인지 말이다.

–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우리들이 정말로 의인이 되었기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 인하여 “대신” 화목제로 희생하였기에 우리 죄가 가리우심, 덮으심을 받은 것이다.
다음 성경구절을 보자….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이다.

–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3:7)

–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4)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4)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3:4)

이 “디카이오마”(의롭다하심을 얻음: 칭의)에서 파생된 “디카이오시스”라는 단어는 원래 법적인 용어이다. 즉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리는 법적신분의 무죄선언을 말한다.
예를 들어보면, 내가 교통사고로 어떤 사람을 다치게 하였는데 재판에서 무죄선언이 되었다고 하자. 실제로 나에게는 죄가 있지만, 무죄선언이 되므로 나는 정죄되지 않고 석방되었다.
다시 말하면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면책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 그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마암아 살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의인이 되었으므로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을 의인이라고 칭하여 주시는 믿음으로 인하여 살게 되었음을 잊지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가 완전히 없어져서 완전한 의인이 되었으므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지만 무죄선언을 하여주셔서 그 죄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값없는 은혜가 되는 것이다.

3) 죄란 무엇인가?

죄는 원죄(sin)와 자범죄(crime)로 분류하며 원죄는 죄책과 죄성(부패와 오염)으로 나눈다.
죄란 물질병사가 아니며, 그러므로 죄가 우리 몸 안에 없어지거나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관계”를 말한다. 우리가 A라는 사람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나와 A와의 관계를 말하며, 내가 B에게 죄를 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인이라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한다.
즉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는 “죄”란 첫째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요한일서 3:4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죄”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죄책”(죄에 대한 책임, 罪責)과 그 죄로 인한 “오염된 죄성”을 말한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는 것은 죄책(죄에 대한 책임)에 대한 사함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이신칭의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노라.” (롬8:1)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는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심판을 면책하여준다는 의미이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정죄함”이 없게하여 준다는 것이다.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6-19)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과 같이 실제로 완전한 의인이 되어 장래 죄도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이 면제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죄책은 없어지지만, 원죄로 인하여 오염된 죄성은 우리에게 남으며, 그 오염된 죄성은 전가되어지므로 우리는 죄를 짓게 된다. 원죄의 쓴 뿌리가 자범죄의 원인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단 거듭난 신자 안에 남아있는 것은 원죄의 결과로 인한 죄성(오염)이다.

아담으로 인한 죄로부터 전가된 죄책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지만, 죄성은 거듭남과 동시에 이제 변화가 시작되었더라고 할지라도 아직 완전하게 완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거듭난 자도 자범죄를 짓게 된다. 거듭난 자에게도 죄악된 옛본성과 정욕이 아직 남아있어 성령의 소욕과 싸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화라는 과정이다.

성경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말라고 도처에서 경고하며 권면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실제로 완전한 의인이 된다면, 성령의 인도는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성경을 보면, 바울같은 사도도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 자신에게 육신의 법, 즉 죄의 법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1-23)

아래 성경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속에 죄가 있으며, 그 죄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7-20)

그래서 인간은 누구든지 의인은 없다….. 만일 하나님이 온전한 의인만을 구원하신다면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 예수를 믿었다 하더라도 그가 실제적으로 온전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의인이라고 불려 주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임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 죄와 허물을 덮고 가리기 위하여 다른 대안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이다…..
바로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히9:22) 속죄의 원칙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4:18)

4) 구원의 확신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시다. 또 심판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몇월몇일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구원파의 주장에 의하면 단 한번만 회개하면 두 번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즉 그들의 구원받은 날짜는 그들이 처음 믿고 회개한 날이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구원파의 교리를 깨닫고 알게된 날이 될 것이다.

박옥수구원파들이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9시30분경에 웨슬레목사가 회심한 시간과 날짜를 알고 있었다고 변명하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
웨슬레목사의 회심은 그가 시간과 날짜를 고의적으로 기억하였던 것이 아니라, 웨슬레목사의 그 사건이 일기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터넷상에서 이렇게 그들에게 질문하였고, 그들은 물론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1) 웨슬레목사의 회심의 날짜와 시간이 구원파의 거듭남의 비밀을 깨달은 시간인가?
(2) 웨슬레목사가 반드시 그 시간을 알아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가?
(3) 웨슬레목사가 한번만 회개하라고 하였는가? 회개하면 죄인이므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했는가?

구원의 확신이란 무엇인가? 어떤 비밀적인 것을 깨닫는 날짜와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후13:5)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에 대한 확증이 없이 무조건 나는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곧 일반교회는 구원이 없으며, 자신들의 거듭남의 비밀을 아는 구원파만이 구원을 이미 받은 것이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즉 박옥수목사가 주장하는 거듭남은 더 이상 회개치 않는다는 것이며, 그 비밀을 아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되어진다.
박옥수목사의 주장대로라면, 일반교회는 반복적인 회개를 하여야 한다고 하니 구원파가 말하는 거듭남과 깨달음이 없으며, 그러므로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구원의 조건이 “회개를 안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회개를 하면 구원을 잃고 회개를 안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들이 말하는 거듭남과 죄사함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일반교회의 그것과 동일하다면, 그들은 “비밀”이란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을 다음과 같이 넷으로 구분할 수가 있을 것이다.

1.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실제로 구원받을 사람.
2.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
3. 나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을 사람.
4. 나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

구원의 확신이란 1번과 3번의 경우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란 개인적, 주관적인 것이 아니며, 믿음의 확증이 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여 “구원”이란 하나의 과정이며 길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구원의 길에 들어섰지만, 우리는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믿음의 지속성과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주의하여야만 하며, 궁극적인 구원은 최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즉 구원이란 “믿음의 현재적인 과정의 연속”이어야만 한다.
어떤 비밀이나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히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고….”(엡3:17)

즉 현재 자신의 믿음을 전혀 확증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과거의 어떤 행위만으로, 혹은 내가 어떤 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어떤 비밀을 알아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비성경적이다.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주권사역이며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
즉 현재 자신의 믿음을 전혀 확증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과거의 믿음만으로, 혹은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과거적인 사실이나 어떤 깨달음으로 내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단언하는 것은 구원의 확증이 아니다.

즉 구원의 확신이란, 내가 지난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었기 때문에 나는 구원을 이미 얻었고, 이 믿음으로 인하여 현재 구원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 믿음을 계속 유지할 것으므로 장래에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확증이 되어져야만 한다.

물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 믿음의 주체는 언제나 인간의 몫이며 인간 스스로의 책임의 한계라는 것을 잊지말자. 너무나 당연히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예수를 안믿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의 확신이란 맹목적이며 주관적인 확신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믿음의 확신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을 자기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여서는 곤란하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
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후13:5)

나는 몇월몇일에 구원 받았다….!!
그것이 기껏 박옥수가 주장하는 비밀인가?
그렇다면 나는 2000년 전에 구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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