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의 신앙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으로 정죄 되어 무고하게 생명을 잃은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기독교의 신앙을 부인하고 자신들 만이 유일하게 구원의 진리를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기존교인들을 유혹하는 이러한 이단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이단들의 가르침에 교인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계에서 무료성경학원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논자는 무료성경학원과 연관된 신천지운동의 주장들이 과연 이단성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연구를 할 것이다. 우선 밝혀두고자 하는 바는 신천지운동의 역사에 대한 소고가 있은 후 이 운동에 대한 이단성의 여부를 가름하는 교리가 수록된 『신탄』과 『계시록의 진상』의 내용들을 중심으로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들에 대한 이만희와 진용식의 공개토론을 중심으로 결론을 맺을 것이다.

1) 신천지 운동의 역사에 대한 소고

이대복의 보고에 의하면 신천지 운동은 이만희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의 출발은 신비적인 체험에서 시작된다. 그는 17세 때에 침례를 받았고 1957년 어느 날 저녁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들판에서 기도하는 중 별들이 머리위에 내려와 자신의 머리 주변을 돌고 있는 환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3일 동안 동일한 경험을 한다. 그 후 집안의 일로 인해 세상을 비관하면서 자살을 시도하던 중 또 환상을 체험하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마을 시냇가에서 신비적인 체험을 갖는다. 그 후 이만희는 서울 오류동에 살면서 장막성전 유재열의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체험하고 성경연구에 몰두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진리를 쫓아가라는 명령에 따라 장막성전에 심취하게 된다. 그러나 장막성전의 유재열의 축재와 비리에 실망한 후 경기도 안양 비산동에 신천지교회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장막성전을 타락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신천지교회가 새로운 사명자임을 주장하면서 무료성경학원이라는 이름으로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무료성경학원은 시온기독교신학원으로 개명하여 16개의 지부를 전국에 두고 있다. 1995년 대한예수교장로교 80회 총회에서는 성경무료학원의 가르침은 “신학적, 일고의 신앙적 가치가 없는 집단”으로 규정한바 있다.

2) 신탄의 주장에 관하여

논자는 이만희가 ‘이단’이라는 선입견을 피하여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만희의 신앙사상을 접근하려 한다.

(1) 이만희는 재림주로 자처하는가?
무료성경신학원을 연구한 진용식 목사는 이만희를 “재림 주, 그리스도, 보혜사, 구주, 사명자, 예언의 사자, 알파와 오메가, 일곱 인을 떼는 자” 등으로 표현하여 그를 사이비 이단의 교주로 규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이비 이단의 교주들은 자신에 대해 직접으로 재림주 혹은 심판주 등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신탄』은 이만희를 직접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인을 뗄 자”라고 과감히 표현하고 있다.
이만희의 재림 주 사상은『신탄』을 통해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제 6장 구원론에서 적극적으로 이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요한 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에 대해 설명하면서『계시록의 진상』은 이만희 자신이 바로 그 증인이라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혼돈해서는 안 될 것이 끝 날에 사도 요한이나 보혜사나 증인이 각기 따로 나타나 역사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 사람으로 보이는 이 사명자들은 각기 다른 인물이 아니고, 동일한 사명을 받은 동일한 인물이다. 마지막 날에 예수의 권세를 받아 구원과 심판, 예언과 증거, 모든 일을 맡아서 수행할 지상의 육체적인 사명자가 나타난다. 바로 이 인물을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들이 사도 요한이요, 보혜사요, 또 증인이다.”

이러한 자신의 성경해석은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스스로 경고하고 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내용을 밝혔기 때문에 이 책을 대하실 분들의 심령에 상처나 아픔이 있을까 심히 우려되는 바이지만 성경을 통하여 살피고 또 살펴서 믿음의 씨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그러나 위의 내용에서 아직은 본인을 재림주라고 직접 표현하지는 않고 있다. 이만희는 또한 자신을 보혜사로 지칭한다. 그리고 그 보혜사는 곧 “예수의 대언자요 또 예수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는 예수와 보혜사와의 관계를 성령과 신부(계 22:17), 백마를 탄자와 백마(계 19:11), 그리고 그리스도와 나귀새끼(막 11:7-10)로 비유하면서 자신이 백마, 신부, 나귀새끼가 의미하는 지상의 보혜사 즉 사명자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령이 그[자신]를 이끌어주시며 양육하시고 연단을 시킨 신 후, 땅의 사명 자, 곧 구원의 역사를 전개하는 새 언약의 사자로 세우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 가운데는 자신을 재림주로 알리는 암시적인 묘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직은 자신이 구체적인 말로 재림 주라고 표현하지 아니했기에 그를 재림주로 속단하기는 아직 힘들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또 “성령이 임하기 전 육체 인간으로서의 사명자가 보혜사”라는 주장한다. 그는 예수도 세례를 통해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육체의 사명자로서의 인간 예수였던 것과 같이 자신도 성령이 임하기 전엔 육체적 사명자였으나 성령을 받은 후 예수처럼 구세주가 된 것처럼 자신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천 년 전 유대나라에 구주가 오셨지만 그가 구주로서의 사명을 시작한 것은 세례를 받으신 후에 그의 머리에 성령이 임하시면서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성령께서 미리 잉태를 예보하시고 각별히 선별하여 양육하시는 육체의 사명 자 인간 예수였다. 오늘날에도 그 때처럼 한 인간 곧 육체적 사명자를 부르시고 그를 양육하시게 된다. 그가 곧 2천 년 전의, 성령을 받기 전의 예수와 동일한 인물이다. 그리고 예수에게 성령이 임하여 구주가 되듯, 보혜사에게 성령이 임하여 비로소 그 보혜사가 구주가 된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2천 년 전의 의인 예수가 오늘날 의인 보혜사로 다시 오셔서, 성령이신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써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강한 표현을 써서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키고 있지만 아직은 실명으로 자신을 재림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강한 표현들이『신탄』의 서두에 먼저 기록된 표현과 연관해서 해석될 때 독자들로 하여금 의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2) 신관에 관하여
『신탄』에 의하면 이들은 삼위일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3위에 대한『신탄』의 해석은 기독교의 정통해석과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삼위 하나님을 인격적인 개체의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와 하나님은 각기 다른 개체가 아니다. 두 분이 일체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이루어 살지 못함은 사탄이 역사하여 예수의 육체를 앗아간 때문이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을 성령과 동일시하며 하나님과 예수를 동일시한다.

“성부는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성령을 말하며, 그 자리는 아버지의 위를 칭한다. 그리고 성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아들로 나타나신 그리스도 예수를 말한다. 즉 아들의 위다…하나님은 아버지의 위에 계시고, 예수는 그의 독생자로서 아들의 위에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될 때 둘은 하나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던 뜻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이미 성령관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본체 신과 그의 거룩한 조직에 속한 모든 영을 포함한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본체 신이 예수와 하나 될 때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들이 주장하는 삼위일체란 성부 성자 성령이 개체의 인격적 존재로 계신 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하나의 영적 존재에 의해 삼위전부가 설명된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을 성령으로 시종일관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모호한 표현으로 성령과 예수의 혼 그리고 땅의 육체를 말하며 이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이 삼위가 일체되는 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논리를 통해 보혜사인 자신이 삼위하나님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께서 이기는 자에게 하신 말씀을 보라. 이기는 그와, 예수와, 하나님, 이 셋이 하나의 보좌에 앉는다. 이 말씀은 이기는 자는 육체의 사명자 곧 보혜사이며, 예수는 이미 그 육체에 거하는 혼이며, 하나님의 보좌는 성령이신 본체 신이 좌정하는 자리다. 즉 성령과 예수의 혼과 땅의 육체 이 셋이 연합하여 하나가 되니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 삼위가 일체되는 날, 그 날이 여호와의 한 날이요. 변화성신하신 신인이 탄생하는 날이다”라는 것이다.

이 신인의 탄생은 바로 이만희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추론된다. 즉 삼위하나님의 설명도 결국은 자신이 신인으로 탄생하는 것을 초점에 맞추어 논지를 정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3) 성경관 오류에 관하여
신천지는 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주석이나 해석 모두를 부인한다. 역사적인 성경해석은 세속적이며 인간의 지식의 도전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이것을 ‘성경의 배타성’이라고 규정한다.

“성경이 지닌 성경의 배타성에 관한 논리적 근거의 제공이다. 무릇 모든 사상이나 종교가 그러했듯이, 지난날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성경은 그 동안 숱한 세속적인 도전, 예컨대 인간의 지식으로 얽어 짠 도그마나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강론 따위의 도전에 직면하곤 했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떠한 세속적인 도전도 단호히 거부한다. 지금까지 역사의 뒤안길에는, 세속적인 것들이 성령인양 허위의 두루마기를 걸치고 성경에 도전했다가 마침내 그 본색을 드러내고 쓰러져버린 잔해들이 무수히 뒹굴고 있다.”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길은 성경이 약속한 인물이 오기 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수많은 신학자들의 강해나 주석은 약속된 인물의 해석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은 단순히 성경의 바른 해독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바른 해독을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이다. 이들은 한 인물이 나타나야 함을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히지 아니한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은 계시록에서 언급한 일곱 인을 뗄 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종국에는 새로운 제단 신천지 증거 장막 성전의 주인공인 이만희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라!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한 증거를 들어라. 모든 산들의 꼭대기에 우뚝 서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으로 모이라….이 성구『사 2:2-3, 미 4:1-2』에 숨겨둔 보화를 캐내어 복 받는 성민이 되라. 모든 산 꼭대기에 우뚝 서 있는 하나님의 성전, 그 성전에서 말씀과 교훈이 솟아나 영생의 샘물이 된다. 이 모든 증거의 말씀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은 일찍이 이 땅에 한분을 보내주셨다. 언약한 백성들의 끊임없는 배도와 멸망의 소용돌이로부터 인류를 해방시켜 새 생명의 나라를 개국하기 위해 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이만희 선생이시다.”

이들은 이만희가 세상의 구세주요 보혜사로 오신 것에 촛점을 맞추어 신구약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가 신천지증거 장막과 자신이 구세주로 나타남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로 누가복음 8장 17절(“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과 욥기 28장 11절(“시냇물을 막아 스미지 않게 하고 감추었던 것을 밝을 데로 내느니라”)을 인용한다. 그리고 신천지 증거장막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로는 이사야 2장 2-3절이나 미가서 4장 1-2절을 인용한다.

“말일에 여호와의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고 모여 둘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지나칠 정도의 은유적인 성경해석에도 일조를 하고 있다. 그들의 해석이 얼마나 기고만장한가를 이해 할 수 있도록 긴 인용구를 인용한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나귀 새끼 옆에는 이미 나귀가 있었다. 이미 나귀는 곧 세례요한이며 새끼 나귀는 그의 제자 된 예수 자신이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올 때에 성령(탄 자)이 예수(새끼 나귀)에게 임하시고(타시고), 세례 요한(어미 나귀)에게 임하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하자. 이러한 일은 재림의 때에도 동일하게 재현된다. 세례요한의 입장인 장막 성전의 어린 종 삼손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양육을 받으신 제자 곧 새끼 나귀에게 성령이 임하여 역사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실 때에 왜 제자들이 “주의 이름(예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소리쳤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끝에 주의 이름으로 오실 자는 이 땅의 육체 인간의 입장에서 부르심을 받게 되고 그에게 성령이 임하여 구원의 역사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름 받은 사람이 백마요 나귀이며 신부다. 그 사명자에게 임하실 자가 성령이요 탄 자이며 신랑이다. 이러한 오묘한 비밀을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깊은 곳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반드시 땅에 있는 한 육체(말, 나귀, 신부)를 택하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여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보혜사, 그는 지상의 사명자다. 그가 백마요, 신부요, 나귀 새끼다. 성령이 그를 이끌어주시며 양육하시고 연단을 시키신 후, 땅의 사명자 곧 구원의 역사를 전개하는 새 언약의 사자로 세우신다. 그리하여 성도들의 이마에 인치게 한 후 예루살렘(성도)이 신부로서의 단장을 마치면 보혜사가 첫 열매인 그리스도로서 변화성신하여 사망을 온전히 이기고, 또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도 길을 열어주어 모든 성도가 차례대로 홀연히 변화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성경구절들이 전혀 이만희 자신이나 신천지 증거장막에 대한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 적용하므로 성경 해석에 많은 오류를 발생시킨다. 나아가서 성경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행위를 일삼고 있다.

(4)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부인한다.
“예수는 믿기만 하면 영생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믿는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갔고, 아직도 천국은 요원하다…지나친 억설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제 우리는 보다 냉철해질 필요가 있다. 믿는 자는 영생한다고 하셨으니 실제로 믿었다면 영생해야 마땅하다.”

이만희는 자신을 믿어야 할 대상이므로 예수를 믿는 믿음은 영생과는 무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만약 논자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면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갔고 아직도 천국은 요원하다”는 표현은 무슨 의미인지 해석주기 바란다.

(5) 초월적인 천국을 부인한다.
“그래서 믿는 것으로써 구원받았다고 안주하는 현생 천국과 죽어서 간다는 사후 천국을 멋대로 그려내었다. 성경에도 없는 허구적인 천국이 오늘의 목자와 성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천국이 없는데 뉘라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으라. 예수는 ‘가는’ 천국이 아니라 리 앞에 ‘도래하는’ 천국을 선포하셨다(마 4:17). 또한 사도 요한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계 21:2)고 말했다…성경에 사후 천국에 관한 기록이 한 구절도 없음을 알자.”

이러한 이들의 표현에서 초월적인 천국개념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며 결국 신천지천국 창조설이며 그로 인해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는 여호와증인과 같은 천국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6) 구름을 성령이라고 주장한다.
엉터리 예언자들이 “구름을 타고 재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주관으로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동일한 태도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교주 안상홍은 구름을 인간의 육체로 해석하여 재림주가 육신으로 온다고 해석한다. 또 어떤 교주는 구름을 말씀으로도 해석한다. 이만희는 구름을 영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이들은 기존교회에서 구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에서 발생한 에피소드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7) 이들은 윤회설을 주장한다.
이들은 기독교가 윤회설을 거부하는 것은 성경과 무관 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도 무관하다고 말한다. 이들은 윤회설의 성경적 근거로 전도서를 인용한다(1:9-11; 3:5; 6:10). 이들은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라는 표현과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등의 표현들을 인용하여 이 말씀이 바로 성경 속에 감추어진 윤회사상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좀더 구체적인 실례로 엘리야의 경우를 장황하게 역설하고 있다. 이 표현이 신약의 세례요한(눅 1: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하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을 두고 한 예언이며 세례요한이 바로 엘리야의 화신으로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이상의 성구를 보면 가브리엘 천사는 엘리야의 심령이 세례요한으로 탄생할 것을 통보하였고, 예수는 엘리야가 이미 왔으매 세례요한이 바로 엘리야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기의 이전 세대(전생)를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답변한다.”

이들은 세례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윤회설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막 8:27-28).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 성경의 해석을 통해 이들은 유대인 자신들도 역시 이러한 윤회설을 믿었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있다.

결론

논자는 위와 같은 논지로 수많은 문제점들을 신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만희가 저자로 되어 있는『천국비밀 계시록의 진상』에도 수많은 문제점들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논자가 이 문제들에 대한 결론은 결국 이만희와 진용식의 공개토론을 소책자로 출판한『무료성경신학원 이단논쟁』이란 책에서 도출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만희의 주장인『신탄』과『계시록의 진상』이 이만희나 신천지 운동과 전혀 관계없다면『신탄』과『계시록의 진상』에서 들어난 신학적 문제점들은 이만희와 관계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용식의 주장대로 이들이 지속적으로 이 두 권을 사용한 것으로 들어난다면 이만희의 주장은 가식이요 속임인 것이다.『신탄』과『계시록의 진상』은 분명히 신학과 성경해석에서 이단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자는 이들의 논쟁을 통해서 이만희는 진용식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고 있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진용식이 ‘이만희는 재림주인가’라고 지적한 질문에 대해 이만희 자신이 ‘재림주가 아니다’라고 말하면 논쟁은 종결되는데 그렇게 말한 곳이 없다. 단순히 설명으로 이어지다가 마지막에도 막연하게 표현한다. “…신약성경에는 육체가 재림주가 될 수 없다. 이긴 자 및 대언자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논자는 이만희에게 되묻고 싶다. 자신이 말하는 “이긴 자 및 대언자”는 누구이며 이만희는 이 사람이 바로 자신을 재림주로 생각하고 표현한 말이 아닌가? 두 번째 실례는 진용식이 ‘이만희는 자신을 보혜사’라고 주장한다는 대목이다. 이 문제도 이만희 자신이 ‘나는 보혜사가 아니다.’ 라고 말하면 될 텐데 그러한 단정적인 대답은 하지 아니하고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래서 이 점에 있어서도 논자는 이만희에게 묻고 싶다. 자신이 성경에서 말하는 보혜사인가 아닌가? 진솔하게 대답해 주기 바란다. 이만희 자신이 말한 것처럼 형제의 잘못을 치유하기 위해 지적하는 것이지 형제를 매도하게 위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여러 문제들도 있지만 이 두 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면 정통 기독교에서는 이만희의 가르침을 이단성이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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